제주를 걷다 보면 느낄 수 있다. 이곳의 음식은 단지 맛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과 땅, 사람의 손길이 만든 결과물이고, 그 안에는 섬이라는 지형의 고유한 조건과 제주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시작되는 이 독특한 식문화는 동네 슈퍼 앞의 떡 한 조각에서, 시장 골목 꼬치 한 줄에까지 이어진다.
그 모든 먹거리엔 ‘제주만의 방식’이 배어 있다.
오메기떡 – 제주 여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고단한 정성
처음 오메기떡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 생김새에 잠시 멈칫한다.
윤기 없는 진회색 표면, 콩가루나 팥고물이 불규칙하게 붙어 있는 투박한 외관.
하지만 이 떡 한 알에는 단순한 간식 이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겉모습이 소박한 만큼, 속에는 제주 여성들의 노동과 인내, 그리고 공동체의 기억이 농축돼 있다.
오메기떡은 원래 제주도의 전통 제례용 떡이었다.
‘오메기’라는 말은 **좁쌀(조)**을 뜻하는 제주 방언인데, 과거 섬 지역에서는 벼농사가 여의치 않아 쌀은 귀했다.
대부분의 농가는 조나 보리를 주식으로 삼았고, 제사상에 올리는 떡조차도 찹쌀 대신 조를 삶아 찧어 사용했다.
만드는 과정도 단순하지만 손이 많이 간다.
삶은 조를 절구에 넣고 오랜 시간 찧어 끈기를 내고, 작게 빚어 팥고물이나 콩고물을 입히거나,
쑥을 넣어 색과 향을 더한 반죽으로 속에 앙금을 채우기도 한다.
특히 예전에는 떡을 찧는 일부터 포장까지 여인들 사이의 협업으로 이루어졌고,
그 작업은 단지 음식을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場)이었다.
지금은 포장도 예쁘게 나오고 냉동 제품으로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제대로 만든 오메기떡은 먹는 순간 확연히 다르다.
조의 껍질이 주는 거칠고 투박한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도 입안에선 은근하고 부드럽게 풀어진다.
거기에 팥고물의 고소함이 더해지면, 단맛에 익숙한 도시인의 입에도 오래도록 남는 여운을 남긴다.
최근엔 시대 흐름에 맞춰 쑥 반죽, 흑임자 소, 감귤 잼, 심지어 크림치즈까지 들어간 오메기떡도 등장했다.
그런 변주도 흥미롭지만, 여전히 그 중심에는 ‘조’라는 재료가 가진 질감과 향, 그리고 검소함이 중심에 있다.
이는 단순히 재료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제주인의 삶의 태도와 속도, 그리고 자연에 맞춰 살아온 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다.
오메기떡은 제주에 잠시 머무는 사람에게는 이색 간식이지만,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겐 의례의 기억이자, 유년기의 풍경이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리는 매개이기도 하다.
지금도 마을 장터나 작은 떡집에서 하루에 몇 판씩만 구워내는 전통 방식의 오메기떡을 만날 수 있다.
화려하지 않고, 진하지 않고, 딱 제주 바람처럼 은근하고 오래가는 그런 맛이다.
흑돼지 꼬치 – 제주 땅에서 나고 자란 진짜 바비큐의 맛
제주 흑돼지를 설명할 땐 한 가지를 먼저 짚어야 한다.
흑돼지는 단순히 ‘검은 돼지’가 아니다.
등이 검고 배가 하얀 제주 토종 품종으로, 오래전부터 섬 안에서 풀어 키운 자연방목 방식으로 자라왔다.
좁은 땅, 한정된 사료 속에서도 땅을 파고, 돌을 이겨낸 이 돼지는 서서히 지방을 축적해 육질이 쫄깃하고 고소한 지방 맛이 강한 고기로 자리를 잡았다.
과거 제주 가정에서는 돼지를 키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집집마다 ‘돗통시’라 불리는 돼지우리와 분뇨 처리를 겸한 재래식 퇴비장이 있었고, 돼지에게는 집안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와 남은 채소가 사료가 되었다.
명절이나 결혼식, 마을 행사가 있을 때면 흑돼지를 잡아 나눠 먹으며 잔치를 열었고, 그 과정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공동체 의식의 한 장면이었다.
지금의 흑돼지꼬치는 그러한 과거의 풍경에서 파생된 도시형 길거리 바비큐라 할 수 있다.
제주의 전통을 담은 고기가 현대인의 손에 맞게 작고 간편한 형태로 변한 것이다.
한입에 베어 물기 좋은 크기로 큼직하게 썬 고기를 나무꼬치에 꿰어 숯불이나 직화에 올린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기름이 사방으로 튀고, 노릇하게 구워진 표면에 특유의 고소한 향이 올라온다.
다 익은 꼬치는 흔히 멜젓(멸치젓)을 희석한 소스에 살짝 담가 낸다.
제주에서는 이 멜젓이 빠지면 ‘진짜 흑돼지’가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특유의 짭조름하고 구수한 맛이 고기의 풍미를 완성시킨다.
맛은 강하지만 거칠지 않다.
지방이 많아 보이지만 느끼하지 않고, 불 맛이 은은하게 배어 있으며, 씹을수록 돼지고기 고유의 감칠맛이 입 안 가득 번진다.
잡내가 거의 없는 것도 특징인데, 이는 고기 손질과 굽는 방식 모두에 오랜 노하우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굳이 양념에 의존하지 않는다.
후추, 마늘, 허브 같은 향신료도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고, 대부분은 고기 본연의 맛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이 점에서 제주 사람들의 식문화가 지닌 절제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요즘은 공항 근처 푸드트럭, 동문시장이나 세화오일장 같은 곳에서도 손쉽게 이 꼬치를 만날 수 있다.
가격은 한 줄에 6~7천 원 정도. 막 굽자마자 넘겨받은 뜨끈한 꼬치를 한 손에 들고 걸으면서 한 점씩 먹는 풍경은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익숙하다.
누군가는 그것을 ‘간단한 길거리 간식’이라 부르겠지만, 사실 흑돼지꼬치는 이 섬의 전통과 고기 문화,
그리고 제주인의 일상 속 자부심이 응축된 한 줄의 풍경이다.
감귤 주스 – 단순한 과즙을 넘어선 계절의 맛
제주에서 감귤은 단지 과일이 아니다.
그건 계절이고, 풍경이며,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마당 한쪽 감귤나무가 가지를 휘도록 열매를 맺고, 겨울바람이 불면 학교 교실엔 감귤 상자가 도착했다.
한 알씩 나눠 먹던 교실의 웃음소리까지, 감귤은 그렇게 제주의 일상에 스며 있었다.
지금도 제주의 감귤 농장은 대규모 기업형 과수원이 아닌 가족 단위의 소규모 자영 농장이 많다.
조부모 세대가 일군 땅을 자식이 물려받아 지키고, 주말마다 가족들이 다 함께 감귤을 따는 모습은 지금도 이 섬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감귤은 그들에게 ‘농산물’이라기보단, 함께 가꿔온 시간과 노동의 결과물이다.
이런 감귤을 단순히 ‘주스’로만 취급한다면, 그건 이 과일이 가진 가치를 너무 단순하게 본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제주의 거리 곳곳에는 100% 착즙 생감귤 주스를 전문으로 파는 노점이 생겨나고 있다.
한라산 자락부터 서귀포 해안, 애월의 바닷길, 함덕 서우봉 아래까지 ‘감귤 100%’라 적힌 오렌지색 이동카트를 마주치는 건 어렵지 않다.
특이한 점은 껍질째 착즙하는 방식이다.
보통은 껍질을 제거하고 즙을 내지만, 제주 감귤은 껍질에 향이 강하고 품종 특성상 쓴맛 없이 균형 잡힌 산미와 단맛을 동시에 지닌다.
즙을 내는 순간에도 산화가 빠르지 않아, 즉석 착즙이라는 방식이 감귤의 가장 신선한 순간을 포착하는 방식이 된다.
주문과 동시에 착즙되는 주스는 기계 소리와 함께 유리컵에 차오르며 진한 주황빛과 함께 특유의 시트러스 향을 퍼뜨린다.
첫 모금엔 산미가 혀끝을 간질이고, 곧이어 단맛이 뒤따라오며 입안을 맴돈다.
목을 넘기고 나면 남는 건 상큼함이 아닌, 묘하게 감성적인 향이다.
마치 어떤 계절의 공기를 들이마신 듯한 기분, 그게 제주 감귤 주스가 주는 진짜 경험이다.
흔히 말하는 오렌지 주스와는 결이 다르다.
단맛에 의존하지 않고,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상품’이 아닌, 이 섬에서 자란 과일 하나를 가장 솔직하게 담아낸 맛이다.
그래서 이 주스 한 잔은 단지 갈증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다.
누군가는 여행의 시작으로, 누군가는 떠나는 길목에서 한 모금 마시며, 이 섬의 공기, 햇빛, 바람을 기억하려 한다.
제주 감귤은 결국 ‘한 계절을 마시는 일’이다.
그 계절은 따뜻하고, 달고, 어쩐지 조금 쓸쓸하다.
그게 이 주스의 진짜 맛이다.
제주 먹거리의 진짜 맛은 '단순함'에 있다
오메기떡 한 조각, 흑돼지꼬치 한 줄, 감귤 주스 한 잔.
이 세 가지는 각각 전통, 고기, 과일이라는 전혀 다른 재료에서 출발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제주의 재료, 제주의 방식, 제주의 시간이 녹아 있다는 것.
제주는 모든 것이 풍족한 땅이 아니었다.
그래서 음식은 화려하지 않고, 재료도 소박하다.
하지만 그 속에 깃든 기술과 정성, 그리고 이 섬만의 느긋한 삶의 리듬은 어떤 도시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맛을 만든다.
제주의 길을 걷다 보면 배보다 먼저 마음이 반응한다.
냄새, 풍경, 그리고 음식 하나에 담긴 기억들이 먹는다는 행위를 훨씬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결국 제주 먹거리의 진짜 맛은 입이 아니라 삶에 닿는 온기일지도 모르겠다.